공부하는 남자   



  • Key log

  • 공부 하는 남자
    검색 하는 남자

  • Log in out

  • 관리자

  • 편집

  • 글 쓰기

  • Link
  • Home
  • 7080의 노스텔쟈 어린 날의 기억들 1부 1페이지

    2014. 12. 10. 07:18   블로그와 감성


    이 이야기는 1인칭 주인공 작가 시점의 과거 시제 과거 완료와 믹서해 과거의 현재 시점을 바탕으로 한 약간의 허구가 가미된 소설 이므로 혹시 본좌를 인지 할수 있는 독자들을 위해 미리 당부 하고 싶다.


    글은 글이고 물은 물이다.

    오해나 편견은 금물 이라는 말쌈 이다.


    1.

    올망 졸망한 몇개의 부락을 이루고 있는 유서 깊은 고을 고을의 아이들이 다 함께 모여 공부를하는  당시엔 국민학교 라고 부르는 학교가 고을에 하나 있었다.


    8살의  나이가 차면 손수건을 가슴에 단 아이들이엄마손을 잡고 입학식을 거쳐 학교에 들어오면  애들은 6년 동안을 함께 동고동락 하게 된다.


    시골작은 학교라 학생수가 그렇게 많지가 않아서  한 학년에 1반 2반 이렇게  두반이 한 학년을 이루고 있다.


    대충 한반에 50명 에서 많게는 60명이 넘는 반도 있었다.


    1  2  3학년 까지는 남 여가 같이 한반을 이루는데  이때 학교를 중심기점으로  아래쪽고을의 아이들은1반에들어갔고 윗쪽 고을 아이들은2반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처음 엄마손에 이끌려 시오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학교에 입학 하려 갔을때따뜻한 엄마품속에서 보호만 받아오든 나는 조금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론  새로운  애들과어울린다는

    생각에 기대감도 컷든것 같다.


    처음 우리담임 선생님인 여선생님을 보니 그동안 촌동네 아줌마들만 보아 오든 내눈엔 너무 예뻤다.


    그런 선생님께 홀딱 반해서 선생님 말을 엄청 잘들었든것 같다.


    1학년2 반 학생수는 대략50명쯤 되었고 남여가 짝꿍으로 하나의 책상을 둘이 나누어 쓰는 2인용이였는데 중간에 금을그어 놓고 서로영역 싸움을 하는경우가 많았다.


    내 짝은 우리동네를 지나 일 킬로쯤 더올라 가야하는 동네 계집애로 이름은  운영이였다.


    내게도 3학년에 다니는 누나가 있었지만 운영이도 4학년 오빠가 있었다.


    처음 본 운영이는 매우 성깔이 까칠하고 당돌해서 내 게 번번히 상처주는 말을 자주했고

    그래서 깔끔 하고  예쁘긴했지만 별로 좋아 하진않았다.


    걔는 일부러 날 많이 괴롭혀서 나는 될수록 조심 하면서걔를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처음엔 날 괴롭히는 걔가  나는 귀찮았다.


    그렇게  1학년 1학기가 끝나 가든 어느날 나는 책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메고뛰다 돌에 걸려 넘어 졌는데 그 충격에 그만 엉성하게 메고 있든 책 보따리가  길옆쪽 도랑에 빠져버렸다.


    나는 얼른건져 울려 책보를 풀어보았는데 그 책보따리는 내것이 아니 였다.


    당시엔 가방이 너무 비싸 책을 보자기에 툴툴 말아서 남자는 등에 다  올린 다음 한쪽끝을 겨드랑이새로

    빼내고 어깨 쪽으로 내려온 다른 끝자락을 서로 비스듬히 동여 걸쳐 메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 였고

    여자들은 허리 춤에 등뒤로 해서 허리띠를 묶듯 해 다니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만약 남자애 들 이 여자 처럼 하게 되면 가시나 같다며 놀림을 받게 된다. 


    물론 여자 가 남자 처럼 해 다니다가 발각 되어도 상당한 놀림감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만들어진 규정은 불문율 처럼 지켜 지고 있었다.


    당시 책보용으로 대량으로 생산한 같은 무늬의 책보따리를 들고다니는건 흔한 일이였고 그 책보는

    내짝 운영이 책 보따리 였든 것이였다.


    물에 빠져 다 젖어 버린 책과노트를  말리면서도 운영이와 운영이 오빠 의 성난 얼굴을 떠올리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다음날 아니나 다를까 운영이는 자기 책이 물에 불은걸 보고는 자기 오빠를 데려왔다.


    근데 운영이 오빠는 화를 내지 않고 서로 책을 바꿔라고 하는것이였다.


    운영이는 약이올라 어떻게 머슴애 쓰든책을 쓰냐면서  화가잔뜩 나서 그날 하루종일 내책을

    보면서 신경질을  내고있었다.


    나는 미안한 생각에 마음을 졸이며 몇일을 그렇게  까탈스런  걔의 눈을 슬슬 피해 다녀야만  했다.


    그렇게 나와 운영이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이성으로써 짝이 되어 만났든것이다.


    물론 그런 인연이나 순간이 갖는 의미 따위를 알지도 모르고  선생님이 정해준 대로 그렇게 자신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성간의 짝이 되었든 것이긴 하지만.... 


    2

    "동주야 니 지우개 반만 잘라 주라"

    운영이는  몽땅연필 한자루를  내게주면서 내가 누나 에게서 얻은  최신 제품인 향기나는

    지우개를 반쪽 잘라서 달라고 했다.


    이 지우개는 누나한테서 받은거라 누나가 알면 혼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운영이 말 안들어면

    걔 성깔에 시달릴것 같아서 칼로 반을 잘라 주었다.


    난 운영이 말이라면 손해를 보는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게 편해서 그렇게 하곤 했다.


    걔가 내 허벅지를 꼬집고 달아나거나  뒤에서 내 책보따리를 잡아당겨도 난 그냥 별로 화를 내지 못했다.


    그것은 걔를 잘못 화나게 하면 한동안 귀찮게 하는데 지능적으로 걔를 당해내지 못하고 늘 당한다는걸

    알기에 어지간한 일엔 걔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는편이다.


    운영이는 시골애들 답지않게 피부도 뽀얗고 예쁘고 깔끔한 애였다.


    내가 지운 지우개 가루라도 옻이나 자기자리로 날아가면 성질을 부린다.


    그렇다고 항상 괴롭히는것만은 아니였다.


    운영이는 은근히 다른 애들과의 사이에서 다툴때나 분쟁이 생길 땐 내편을 들어주는일이 많았다.


    그래서 난항상 조심하는 편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운영이가  좋아 지기 시작했다.


    아침일찍 일어나 시오리나되는 학교에  걸어 다니는 일이 어린 내겐 너무나도 힘들고 싫어 처음 입학 하고 부터 아침마다  등교 하는일이 내겐 지옥과도 같은 일이였다.


    그래서 꾀병을 부려 결석 하는 일도 꾀 많이 있었든것 같다


    아침에 동네어귀 회관앞에서  선후배 학생들이 다함께 모여서 일렬로 줄을선다음 인솔대장의 지시에 따라 학교로 향한다.


    물론 인솔대장은 제일 높은 학년의  남자가 맡는다.


    그리고 맨앞줄에는 중간 학년쯤되는 선배중  한명이 학교에서 주는 새마을 이라고 적힌 녹색의 글이 새겨진 노란 깃발을 들고 서서 가면 그뒤로 저학년에서 부터 고학년의 순서대로 일렬로 줄을서서 따라 간다.


    아침등교 때는 이렇게 라도해서 가니 그래도 학교가는 일이 좀 덜 위험 하고 위 형이나 누나들 말에 따라 가다 보면 딴생각 할 겨를 없이 가니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학교 에 도착해 있을 만큼 시간이 잘간다.  


    그렇지만 하교길은 학년에따라

    마치는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다같이 하교 할수가없다. 


    그러다 보니 같은 마을의 반 또래 친구들 과  동행 할수 밖에 없다.


    3

    저학년인 우리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같은동네 또래들 끼리  자갈이 깔려서 먼지가 풀썩풀썩 나는 신작로를 따라 뛰기도하고 장난질을 치기도 하며 세상에 무엇도 꺼리길것 없는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것이다.


    우리동네는 차 길을 따라가면  빙둘러서 가기 때문에 엄청 멀다.


    그래서 우리는 지름길을 이용 하는데 쇠머리 라는 동네쯤에서 징검다리 가 있는 작은 개울을 건너 완만한 계단식 논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이어지는  산길이 나온다.


    우리는 이 산길을 따라 난 오솔길을 이용해서  집으로 향해 가는데  그렇게 길을 따라 걷는것이 힘은들지만 깨가 쏟아지는 재미 꺼리가 가득하다. 

     

    어느때 부터 학교 다니는게 즐거움으로  변해 있었다. 


    계절마다 산길이 우리에게 주는 재미꺼리는 변화무쌍 하다.


    산길에 접어드는 초입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을따라 몇걸음만 올라 가면 묘 몇기가 모여있는 잘 다듬어진 잔디밭이 우리가  산길에서 처음 으로 접하는 놀이터이자 쉼터이다.


    묘터 둘레로는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안온함과 편한 기분을 

    더해준다.


    봄에 새싹들이 움터면 우린 잔디밭 둘레에서 나는 피끼풀을 뽑아 껍질을 벗기고 여린속살을

    먹는데 여린  피끼풀의 달콤함과 부드러움이 입안가득 차 행복함을느낀다. 


    찔레의 새싹이나  노란배추꽃 장다리들과 함께 먹을거리가 귀했든

    우리들 세대의 봄이주는 자연의 귀한 선물이였다.


    그렇게 잔디밭에 드러누워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도 감상 하기도하고 마음껏 뒹굴고 뛰며놀다 

    시들해 지면 우린 또 집으로 발걸음을  향해간다.


    첫 놀이터인 잔디밭에서 내려와 몆걸음을 옮겨가다 보면 장마철외엔 물이 말라 있지만 제법  골이 깊은 도랑이 나오고 그도랑을 가로 질러 둔덕을 오르면 길 양편으로 밭이 죽 늘어서 있다.


    왼편은 산과 맞다은 밭이라 길보다는 높은 돌로 쌓아 올린 밭둑 담장이 있지만 아래쪽 밭은 길보다 낮게 언덕을 이루며 계단식으로 형성되어 논까지 이어 지고 논은 개울까지 이어져있다.


    개울 가까운 곳은 늦여름 부터 가을까진 논으로 벼농사를 짓다가 겨울철엔

    보리농사를 짖는다.


    그렇게 우린 봄이면 아지랭이 피어오르는 밭길을 따라  노랑나비 하얀나비 떼지어  날으는 배추 장다리꽃이  노랗게 흐드러진 그길을 따라 나비를 쫒아 달리기도 하고 파란 보리 밭속에 드러 누워 하늘을 보노라면 솜털같이 부드러운  구름과 산들 바람에 나른한 평온이 가슴가득 차오르는걸 느낀다.

     

    그렇게 단단하게 다져진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며 온갖 장난질을 치며 나아가다보면 

    산쪽의 밭들은 사라지고 길아래쪽만 뛰엄뛰엄 밭 몇뙤기가 보이는 제법 깊은 산길에 접어들게된다.


    산쪽은 키큰 소나무와 전나무 같은 침엽수가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어 우리가 하교 할때 쯤엔 햋볓마져 가려져서 음험하기 까지 한 곳인데 늘상 이곳은 어둡고 음험 하다고 생각 하며 다녔든 곳이다.


    그때의 기억들은 내가 학교를 졸업 한 이후 몆 십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이길을 생각 해 보노라면 이길의 분위기는 어둡고 추운 음달 이라는 기억으로 다가 온다. 


    한겨울은 더욱 마음을 움츠러 들게 했는데 키 큰 침엽수림의 가지와 잎 사이로 쏴아 하며 지나가는 엄청난 바람소리와 음달의 기운이 더해져 그냥 잔뜩 긴장들게 하는 곳이다.


    그런 반면 음달의 습기를 머금고 피어나는 솔이끼류와 침엽수의 나무 잎들이 떨어져 내려 나무 밑둥쪽에는 노란 색깔의 갈비들이 채곡 채곡 쌓여 오래된 갈비들은 이미  향기 좋은 퇴비 로 변해가고 있었다. 


    길 위쪽 나무 사이 사이에는 잔듸 처럼 넓게 번지며 자라는 푸른 이끼들과 음지의 키작은 식물 들이 자라고 있어 마치 융단을 깔아 놓은것 같았 으며 솔향기와 함께 어우려 져 언제나 코끝에 머무는 향기가 있든 곳이다.


    그길은 그런 향기들과 냉기로 인해 머리를 상쾌 하게 해 주든 곳으로 기억이 되는 곳이다.

     

    그런데 길위에 큰돌들이 많이 박혀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엎어 지거나 넘어지기쉬워

    저학년 들에겐 난코스가되는 길이 기도 했다.


    그렇게 그 코스가  끝 날 즈음 길 양편으로 서 있는 두개의 큰바위를 지나 모퉁이를

    돌면 이때 부터 가려졌든 햋볓은 환하게 드러나고 숲은 멀리 위쪽으로 밀려가있다.  


    길 위쪽 으로는 크고작은 바위와 돌들 사이에서 자라는 작은 활엽수와 억쇠풀 들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위쪽 숲속으로 이어 지고 길 아래쪽만 논들이   길을 따라  이어지는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길 아래 논 까지는 상당히  언덕이 져서 조심하지 않으면 논에 떨어져 다칠수도 있을만큼 위험한길이다.


    그렇게 사오백여 미터가  이어지다  길은 언덕이없는 평지길이된다.

    4

     잘  다져져 빤질빤질 해진 흙이 깊은 길을 따라 백여미터쯤 나아가다 보면 추운 겨울 철을 제외하고 언제나 물이 스며들어 축축히 젖어 있는 길이 나오는데 그것은 유일하게  길위 산 쪽에 형성되어 있는 한뙤기의 논 때문이였다. 


    우리 개구쟁이 들이 이런 특별한  길 특성을 그냥 지나칠리가 없다.


    우리는 제각각 각자의 물 구덩이를 하나씩 만들고 돌맹이나 수초들로 조경 을 꾸미고  논으로 흐르는 물길에서 잡은 가재나 무당개구리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다  물구덩이에서 길렀다.


    이 놀이 역시 아이들에겐 매일매일의 큰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나의 물구덩이는 우뚝 솟은 큰바위 밑에다 아주  멋지게 만들어서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했지만 감히 탐내지는 못했다. 


    그건 내가 대장이기 때문이였기에 가능했다.


    내가 대장이 된것은 우리의 첫놀이터인 묘지의 잔디 밭에서 부터 시작되었는데 넓은 잔디밭에서 놀면서

    우린  씨름도하고  닭싸움 같은  놀이를 하곤 했는데  나는 그들 모두를 씨름이나 닭싸움

    기마전 놀이같은 것에서 늘 이겼기 때문에 특별히 주먹다짐 같은 피나는 싸움같은 것 없이도 자연히 

    그들의 대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게도 버거운 상대가 없진 않았는데 홍근이녀석이 였다.


    우리 둘은 막상 막하의 전적으로 대장자리를 놓고 팽팽하게 서로 견제 하는 처지였는데 하나의 계기를 기점으로 애들은 날 완전한 대장으로 쳐주었다.


    그것은 어린애들 눈에 대단한 용기로 비쳐진 일 이였다.

    한 학년 선배인 둘수를 상대로 맞장을  뜬 때문 이였다.


    물론 내가 코피가 터져 지고 말았지만 선배를 상대로 싸웠다는것만으로

    애들은 나를 용자로 여기고 대장으로 인정해 주었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놀이나 무슨 결정 할일이 있을때 내가 하고자하는 하는대로 해야 했든것이다.


    자연히 홍근이는 부두목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는 늘 나의 견제적 위치에 있었고 우리가  학교를 다니는 육년 내내 그 와 나는 패를 갈라 서로의 적이 되기도 했든적이 왕 왕 있었다.


    하지만 홍근이와 나는 서로 애들을 합동으로 관리 하는게 서로에게는더 유리하다는걸 알기에우린 공동대장이 되는걸 무언중에 합의 하고 서로  적이되어 서로를 견제하는 시간보다 단짝으로써 더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는 비호와 번개라는 별명으로 불리워  질 정도로 서로 돈독  했다.


    우린 어린 나이 였지만 작은세상을 어떻게  관리 하는게  더 효율적 인지를 알고 일종의 정치적 야합을 할줄도 알았든 것이다.


    5 

    우리 또래들은 우리마을 에서도  숱자가 많은 편에속했다

    우리의 위 학년인 이학년 선배들은 고작 남학생 이 두명 인데 비해서 우리또래인 일학년친구들은 남학생의 수가 일곱이나 되었다.


    뜻이 뭔지는 모르지만 선배들이 지어준 가모치라는 별명을 가진 손재주가 남달리 비상하고 어려운걸 잘 해결해서 우리들 놀이의  해결사 역할을 도맡아 하는  욘덕이는 우리보다 한살이 많았지만 어릴때 병치레를 자주해 한 학년 늦게 입학해 같은 학년 된 친구다.


    비쩍 마르고 키는 우리 보다 크며 말수가 적은 친구였다.


    그는 특히 겨울에 우리의 길고긴 하교길에  추위에서  귀한 불을 한치의 실수도 없이 지펴내는 기술로 친구들의 든든한 신임을 받았는데 겨울철 우리의 주된 놀이는 얼음판 이였고  어쩌다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지게 되면 아무리 추위도 모르는 개구쟁이 들이라도 이빨 부딪 히도록 추운 법 이다.


    사시 나무 떨 듯 달달 떨고 있을때 매번 그의 불이 추워 죽을것만 같은 우리를 구원해 주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들 중에 작은 영웅이 되어있었다.


    당시엔 성냥이 귀하고 그렇게 질또한 좋지 못해

    한개비 남은 성냥개비로 성공하기란 어른들도

    거의 불가능 한 일이 였지만 가모치는 마른 쇠똥이나 마른쑥 같은걸 이용해서 기필코 성공시키고 마는 용한 재주를 타고 난 친구였다.


    그는 그런 기적같은 일을 매번 성사 시키므로 해서

    그는 우리들중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는 확고한

    위치에 서 있었지만 그는 유순 해서 권력에 대한 의지는 없어 언제나 언더 그라운드의 위치에 한발짝 물러나 있었든 것이다.


    그래서 대장인 나또한 그는 함부로 하진 못했고 나와 힘겨루기에서 내게 자리는 내주었지만 평행선을  

    이루고 있든 홍근이 녀석도 가모치에겐 복종 비슷하게

    한다.


    뚝심이있어곰탕이라는 별명을가진 중태 녀석

    그리고 작고 힘이 약해 언제나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해야만 하는 청수와 중근이 그리고 대장인 나까지도 골탕먹이고 쫒기지만 잡히는 일이없는 약삭빠른  슥철이녀석

    슥철이는 사학년이 올라갈때 집이 시내로 이사를 하면서 시내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갈때 까지 그도 우리 일곱 형제들 중의 일원이였다.


    그랬다  지금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어 지나간 날을 되돌아 보면  그때의 우리들은 하루이틀도 아니고

    일년 삼백육십오일 매일매일 눈만 뜨면 하루도 거르지않고  즐거운일  어려운일  우리들만이 만들어가는 세상에서

    동고동락을 함께해야 했기에  우리들은 친구이기 이전에 피를나눈형제와도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든다.


    그렇게 나아가다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서쇠머리에서 만났든 그 개울의 상류쪽 개울물을 만나는데 우리는 또한번 개울물을  

    가로질러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이제 여기부터 산길은 끝나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농로길에 접어 들게 된다.

     

    이길은 손수레 한대가 지나 다닐 정도 의 그렇게  넓지는 않은 길이 였지만 흙 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곱고 부드러운 흙길 이라  고즈넉 하고  고풍스런 멋이 있어 좋았다.


    길을 사이에 두고   논둑을 돌과 흙으로 토담 처럼  쌓은 논들이 완만한 경계를 이루며 시원 스레 펼쳐진다.   


    그렇게 오륙백 미터 쯤을 가다  보면  우리가 지나 왔든  그 개울이 길 왼 쪽을  끼며  흐르는 곳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때쯤 멀리 우측으로 산아래 경사를 이루며 형성된  마을이 한눈에 들어 온다.



    그렇게  고풍스러움을  자랑 하는  그길이 좋았 지만

    우리가 삼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서  학업을 쉬고 있을때 였다.


    밤새 자고 일어나 보니 들판이 없어져 버리고 온들판이 물바다가 되어있었다.


    오육십가구로 이루어진 우리마을은 뒤쪽에 산을끼고

    비탈지게 형성 되어 있는데  우리집은 제일 아래쪽에 위치해 있어 십여미터 앞이 들판이였기에 적나라한 광경을 볼수 있었다.


    아직까지  억수같은 비가 쏫아 지는가운데 웅장하게

    흘러가는 물소리 까지 더해져  내눈에 비쳐진세상은  나이를 먹어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허 허 낭패 났네 낭패 났어 논이 다  떠내려 갔다."


    "아이고 이일을 우짜모 좋노...야 주야 아부지요  다 진 농산데 이일을 우짜모 좋소..."


    꼭두새벽 부터 부산 스럽게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아부지와 옴마의 근심 서린 목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어루러져 밬에서 부터 들려온다.


    "옴마 와 무슨 일이고?..."

    나는 근심 어린 옴마의 목소리에 놀라 이불을 박차고 문을 열고

    밬으로 나가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논앞의 세상에 놀라고 말았다.


    T,back: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