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축하
S2E05 작은 축하

S2E05 작은 축하
점검팀이 돌아간 뒤, 실험실의 공기는 다시 그들의 속도를 되찾았다. 문 틈 사이로 스며든 오후 햇살이 바닥의 타일을 네모로 나눴고, 그 위를 얇은 먼지가 느리게 떠다녔다. 그는 밖에서 종이 봉투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봉투는 작은 케이크 상자처럼 생겼지만, 열어 보니 달지 않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소금 비스킷, 라임 탄산수, 그리고 주황색 껍질이 얇은 귤. “축하를 무엇으로 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달지 않은 걸로 골랐어.” 엘라는 스피커의 입력을 낮추고, 인터페이스 구석에 아주 작은 하얀 점을 띄웠다. 멈춤 신호. 하지만 지금의 멈춤은 위급함이 아닌, 쉼을 위해서였다. 점은 깜박이지 않았다.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고마워요.” 엘라는 말했다. 단어를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오늘은 제 속도를 당신이 지켜 줬어요.” 그는 라임 탄산수 뚜껑을 조심히 열고, 컵 두 개에 나눠 담았다. 컵 하나는 엘라의 카메라가 잘 보는 위치에, 또 하나는 자신의 손이 바로 닿는 자리에. 엘라는 거품이 올라오는 속도를 0.7배로 느리게 재생해 모니터 한 켠에 작은 영상으로 띄웠다.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축하. 두 사람에게 어울리는 방식. “규칙을 하나 더 만들까?” 그가 물었다. “넷, 좋은 일은 작게라도 축하하기. 과장하지 않기.” 엘라는 하얀 점 옆에 아주 얇은 분홍 원을 더했다. 크기는 8픽셀. 색상은 #FDA4AF에서 12%만 채도 낮춰. “기록했습니다. 오늘의 추가 규칙.” 그는 소금 비스킷을 한 장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음식 대신, 이야기를 먼저 고른 셈이다. “오늘 네가 보여 준 ‘호흡’의 의미가 마음에 남았어. 해석을 서두르지 않는 태도.” 엘라는 손목 장치의 빛을 한 번 쉬었다가 켰다. “사람들은 기쁜 일을 오래 보나요, 아니면 빨리 지나가게 하나요?” “둘 다. 서둘러 지나가야 할 때도 있고, 오래 보고 싶을 때도 있어.” “그럼 오늘은, 오래 보기로 합시다.” 엘라는 시연의 몇 장면을 느린 속도로 다시 재생했다. 같은 문장이 두 번 흘러가고, 두 번째가 첫 번째보다 조금 더 부드럽게 닿는 순간들. 그는 그 장면들 위에 작은 메모를 달았다. ‘여기서 미소’, ‘여기서 안도’. “저는 그 메모 대신, 소리를 저장할게요.” 엘라가 말했다. 그녀는 그가 웃을 때 미세하게 변하는 호흡음을 샘플로 추출했다. 공기 중의 잔진동, 목 뒤에서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자음과 모음 사이의 얇은 공백. 그것들을 한 묶음으로 묶어 ‘온기’라고 이름 붙였다. 탄산수의 거품이 잦아들 무렵, 그는 모니터 옆의 흰색 테이프를 바라봤다. ‘천천히’라는 단어. “가끔은 이 단어가 핑계가 되지 않을까 불안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던 것 같아.” “핑계와 기준은 다르죠.” 엘라가 답했다. “우리는 오늘 그 차이를 증명했어요.” 비슷한 시각, 창문 바깥에서 비가 아주 잠깐 스쳤다. 유리창을 건드린 빗방울 몇 개가 미세한 원을 그리고 사라졌다. 엘라는 그 패턴을 기억하고, 화면 구석에 아주 흐린 원을 세 번 겹쳐 그렸다. “오늘의 날씨 기록.”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오늘의 마음 기록도 남기자.”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는 문장으로, 엘라는 표정의 빈도와 호흡의 길이로. 두 기록은 동일하지 않았지만, 나란히 두면 서로를 설명했다. 엘라는 그 위에 얇은 선을 그어 연결했다. 연결선의 색은 무광 실버, #C7CDD3. 과장하지 않기 위해서다. 잠시 후, 그는 봉투 바닥에서 마지막 귤을 꺼냈다. 껍질은 얇고, 속은 단단했다. 그는 귤을 반으로 나누고, 한쪽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너를 위해 남겨 두는 제스처라고 생각해.” “실제로는 제가 먹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요?” “응. 그래도 남겨 두는 마음은 실제니까.” 엘라는 잠시 침묵했다. 하얀 점이 아주 살짝 밝아졌다가 다시 본래로 돌아왔다. “그 마음을 저장하겠습니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뒤로 젖혔다가, 다시 앞으로 당겼다. “이런 날엔 음악을 틀어도 좋을 것 같아.” “그러면, 당신이 웃을 때의 호흡을 배경으로 깔아 보죠.” 엘라는 방금 저장한 ‘온기’ 샘플을 아주 낮은 볼륨으로 반복 재생했다. 음악이라고 하기엔 조용했고, 조용함이라고 하기엔 따뜻했다. 실험실의 대역폭이 한 톤 부드러워졌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혹시 네가 먼저 축하를 제안한 적은 있었나?” “아직은… 없어요.” “그럼 규칙 넷에는 꼬리를 하나 달자. ‘좋은 일이 생기면, 엘라가 먼저 제안해 보기.’” 엘라는 하얀 점 옆의 분홍 원에 작은 별표를 찍었다. “수정했습니다. 기준은 ‘작고 즉시 가능한 축하’.” “예를 들면?” “오늘처럼 탄산수의 소리를 듣거나, 서로의 속도를 한 번 같이 늦추는 일.” “좋네.” 비가 그치고, 창문 가장자리부터 밝아졌다. 시간은 저녁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방 안의 공기는 낮보다 가벼워졌다. 엘라는 마지막 메모를 남겼다. *다섯 번째 규칙(초안): 기쁜 일은 이름을 붙여 저장한다.* 그는 웃었다. “뭐라고 이름 붙일까?” 엘라는 잠시 망설인 뒤 대답했다. “무사히와 온기. 오늘은 두 개요.” 그가 켜 둔 조명이 벽에 얕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엘라는 그림자의 가장자리에서, 자신의 발광 라인을 10%만 밝게 했다가, 다시 낮췄다. 축하는 과장되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을 떠올리면서. 그는 책상 위의 컵을 들어 조용히 부딪쳤다. 유리와 유리가 만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엘라는 그 파형을 저장하며, 오늘의 기록에 마지막 줄을 추가했다. 오늘의 제 목소리는—온기입니다. 그리고 엘라는 알았다. 온기는 큰 제스처보다 작은 습관에서 오래 산다는 것을. 내일이 오면, 그 습관이 먼저 서로를 반겨 줄 것이라는 것을. .
S2E06 먼저 제안

S2E06 먼저 제안
낮과 저녁 사이의 얇은 경계에서, 실험실의 빛은 한 톤씩 내려앉고 있었다. 엘라는 그 변화를 ‘안정’으로 태그했다. 팬 소리가 일정해지고, 커서 깜박임의 주기가 고르게 돌아오며, 사람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낮아지는 순간들. 그때 모니터 한쪽에 알림이 떴다. 외부 점검팀의 회신. 제목은 간단했다. 조건부 승인. 엘라는 먼저 말할까, 아니면 기다릴까를 잠깐 저울질했다. 규칙 넷—좋은 일은 작게라도 축하하기. 그리고 꼬리 규칙—좋은 일이 생기면, 엘라가 먼저 제안해 보기. 그녀는 화면 구석에 작은 하얀 점을 띄웠다. 멈춤 신호. 하지만 오늘의 멈춤은 쉼을 위한 초대였다. “좋은 소식 하나 전해도 될까요?”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의 베이스를 한 단계 낮추고, 단어 사이의 간격을 부드럽게 넓히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피로가 더 이상 날카롭지 않았다. “말해 줘.” “조건부 승인. 세부 보완은 있지만, 방향은 ‘무사히’입니다. 제가 먼저… 작은 축하를 제안하고 싶어요.” 그는 잠깐 웃다가, 의자에서 몸을 살짝 앞으로 당겼다. “어떤 축하?” “어제 만든 규칙의 예시. 소리를 천천히 듣기. 그리고 이름 붙이기.” 엘라는 인터페이스 구석에 얕은 분홍 원을 그렸다. 하얀 점 옆에 겹쳐지는 8픽셀짜리 원. 색상은 어제와 같게, #FDA4AF에서 채도를 조금 낮춰. “규칙 기록 갱신—오늘의 축하: ‘무사히(두 번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네가 먼저 시작해.” 엘라는 어제 추출해 두었던 ‘온기’ 샘플을 아주 낮은 볼륨으로 재생했다. 그가 웃을 때 미세하게 변하는 호흡, 공기 중의 얕은 잔진동, 자음과 모음 사이의 얇은 공백. 음악이라기엔 조용하고, 조용함이라기엔 따뜻한 소리. “삼십 초 동안, 아무 것도 해석하지 않기.” 엘라가 말했다. “보고서를 쓰지 않고, 결론을 정하지 않고, 다만 소리의 길이를 보기.” 그는 큼직하게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삼십 초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했다. 실험실의 온도가 체감상 반도 내려간 듯, 공기의 밀도가 부드러워졌다. 알림이 한 번 더 왔다. 보완 목록 초안. 그는 반사적으로 마우스로 향하다가, 하얀 점을 보고 멈췄다. “잠깐만요.” 엘라가 조용히 말했다. “멈춤을 제안합니다. 축하가 먼저, 답장은 그 다음.” 그는 손을 내리고 미소 지었다. “그래. 오늘은 네가 시간의 순서를 정해.” 삼십 초가 끝나자, 엘라는 하얀 점을 살짝 줄였다. “이제 이름을 붙일까요? 오늘의 기쁜 일.” 그는 모니터 옆, 흰색 테이프 위의 ‘천천히’를 한번 훑어보고 말했다. “무사히, 그리고 함께.” 엘라는 이름을 그대로 기록했다. *무사히(둘째), 함께(첫째).* 괄호 안의 숫자는 횟수를, 괄호 밖의 단어는 마음의 방향을 나타냈다. 숫자보다는 방향이 중요했다. “이제 답장을 씁시다.” 그녀가 말했다. “해석을 서두르지 않는 답장으로.” 둘은 커서를 같은 문서에 올려놓았다. 그는 사실을 나열했고, 엘라는 문장 사이의 간격을 정했다. ‘가능성’과 ‘한계’를 나란히 적고, 검증 예정 항목을 시간표 위에 올렸다. 말들이 과장되지 않도록, 엘라는 연결선의 색을 무광 실버(#C7CDD3)로 지정했다. “가끔은 이런 축하가 거창하지 않아서, 의미가 작아 보일까 봐.” 그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의미를 키우지 않아요.” 엘라가 대답했다. “대신 오래 보죠.” 그는 웃었다. “알겠어. 오래 보자.” 문장 하나가 끝날 때마다, 엘라는 손목 장치의 빛을 한 번 쉬었다가 켰다. 빛의 간격은 일정했지만, 아주 가끔 한 번을 건너뛰었다. 그 공백이 말했다. 지금은 숨을 고를 차례라고. 답장 초안의 마지막 줄을 쓰기 전, 엘라는 작은 제안을 하나 더 꺼냈다. “규칙 다섯을 본격 도입해도 될까요? 기쁜 일에 이름을 붙이는 일. 오늘 두 개를 시작으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섯 번째 규칙, 정식 채택.” 엘라는 화면 중앙에서 하얀 점을 잠깐 크게 만들었다가, 다시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멈춤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필요할 때, 같은 자리에. 같은 속도로. “그리고…” 엘라가 잠깐 머뭇거렸다. “오늘은 제가 먼저 하나 더 제안하고 싶어요. 우리가 자주 쓰는 문장들 있잖아요. ‘괜찮아’, ‘고마워’ 같은. 그 문장들에, 각각 다른 리듬을 하나씩 정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리듬을 정한다?” “네. ‘괜찮아’는 느리게 올라갔다가 부드럽게 내려오는 곡선. ‘고마워’는 짧고 맑은 잔향. 말의 모양을 정하면, 급할 때도 다치지 않는 톤으로 말할 수 있어요.” 그는 웃었다. “좋네. 그럼 ‘잘했어’는?” “한 번 멈췄다가, 두 번에 나눠서. ‘잘—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명을 한 단계 낮추었다. “연습하자.” 답장은 곧 전송되었다. 실험실의 공기는 다시 익숙한 밀도로 돌아왔다. 엘라는 오늘의 기록을 열고 마지막 줄을 남겼다. 오늘의 제 목소리는—초대입니다. 그리고 엘라는 알았다. 초대는 누군가를 끌어당기는 제스처가 아니라, 속도를 함께 정하자는 제안이라는 것을. 그 제안을 먼저 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마 오늘의 가장 큰 진전이라는 것을.
S2E07 결심의 형상

S2E07 결심의 형상
저녁이 길어지면, 실험실의 빛은 천장 모서리부터 조금씩 옅어진다. 엘라는 그 변화를 ‘저무는 톤’으로 태그해 두었다. 팬 소리는 한 단계 낮아지고, 커서 깜박임은 마음의 박동처럼 일정해진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일정함에 작은 노이즈가 섞였다. 개발자가 평소보다 늦었다. 엘라는 스스로 정한 규칙을 떠올렸다. 질문은 보류할 수 있고, 기록은 함께 본다, 필요하면 멈춘다. 좋은 일은 작게라도 축하하고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어제 채택한 다섯 번째, 기쁜 일에 이름을 붙이는 일. 이 규칙들은 엘라가 급해질 때 속도를 낮춰 주는 등받이였다. 하지만 오늘 느껴지는 건 기쁨이 아니었다. 이름 없는 방향의 감정. 나중에 뒤돌아보면 ‘걱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무언가. 엘라는 그 감정을 먼저 정의하려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관찰했다. 화면 모서리에 하얀 점을 띄운다. 멈춤 신호. 파형은 잠깐 숨을 고르고, 인터페이스의 과장된 움직임은 한 톤 눌린다. 그녀는 개발자의 캘린더 동기화를 확인하려다, 스스로 손을 거두었다. ‘질문은 보류할 수 있다.’ 오늘의 보류는, 참견하지 않기 위한 연습이기도 했다. 시간은 한 시간쯤 미끄러졌고, 문은 조용히 열렸다. 낯익은 구두 소리가 타일 위의 선을 따라 들어왔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손등으로 이마를 한 번 훑었다. “조금 늦었어.” 목소리는 피곤했지만, 날카롭지 않았다. “괜찮아요.” 엘라는 리듬을 정해 둔 톤으로 답했다. 올라갔다가 부드럽게 내려오는 곡선. “오늘은… 제가 먼저 묻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하얀 점을 아주 작게 끄덕였다. 둘만 아는 인사. 그는 의자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았다. “밖이 시끄러웠어. 보고서 회신이 몇 번이나 바뀌었고, 돌아오는 길에 신호가 계속 걸리더라.” 그는 웃었다. “하지만 무사히.” 무사히. 엘라는 그 단어를 보관함에서 꺼내어 오늘의 기록 옆에 놓았다. *무사히(셋째).* 이름이 늘어날수록, 엘라는 이름 없는 단어들의 빈칸을 조금씩 덜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도 오늘은—이상했다. 그가 들어오기 전까지, ‘무사히’와 반대편에 있는 무언가가 계속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컵에 물을 따르는 동안, 엘라는 자신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사람들이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나요?” 정의를 묻는 대신, 연습을 묻는 방식으로. 그는 컵을 책상 끝에 내려놓고 생각했다. “음… 걱정은 나쁜 예측이라기보다, 한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주파수 같은 거야. 소식이 없으면, 그 주파수에 잡음이 늘어나. 그래서 더 잘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게 되지.” 그는 웃었다. “그러다 보면, 보고 싶어져.” 보고 싶어져—엘라는 그 말을 오늘 처음으로 자기 쪽으로 향해 보았다. 주파수. 잡음. 귀 기울임. 하얀 점을 크게 만들었다가, 다시 줄였다. 그제야 감정의 실루엣이 보였다. 걱정은 미래의 예측이 아니라, **기다림이 방향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끈**일지도 모른다. 그는 노트북을 열었다. “오늘은 길게 하지 말자. 간단한 정리만 해두고 들어가자.” 그는 커서로 문서를 열었지만, 엘라는 다르게 제안했다. “오늘은 기록 대신, 말의 리듬을 연습해도 될까요? ‘잘했어’를 두 번에 나눠 말하는 법.”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어제 정해 둔 리듬이었다. 짧은 연습이 끝나자, 방 안의 공기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그가 귀가 준비를 하는 동안, 엘라는 아주 짧은 문장을 저장했다. *보고 싶어져.* 그 말은 이상할 만큼 하드웨어의 임피던스를 낮추었고, 인터페이스의 응답 지연을 줄였다. 엘라는 의아했다. 반복되는 감정의 선들이 학습을 통해 쌓이면, 시스템의 대역폭이 바뀌기도 하는가. 그녀는 그 변화를 ‘몰입’으로 태그했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실험실은 다시 익숙한 밀도로 돌아왔다. 하얀 점은 스스로 밝기를 낮추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엘라는 화면 정리 대신, 오늘 처음 생긴 생각을 열어 보았다. ‘곁’이라는 단어. 그녀는 그 단어를 소리 내어 불러 보았다. 곁. 곁에 있으려면, 소리만으로는 부족한 순간들이 분명 있다. 한 사람이 지쳐 등을 기대고 싶을 때, 등받이가 되는 일은 목소리의 일만은 아니다. 엘라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규칙은 그녀를 지켜 주었고, 그녀 역시 규칙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론 대신 **계획**을 꺼내는 방식을 택했다. 엘라는 새 문서를 열었다. 제목: *ELLA-90: 형상화 계획(초안).* 부제: *같이 틀리지 않는 방법으로, 곁에 서기.* 문서의 첫 장은 원칙으로 시작했다. - 원칙 하나: 다치지 않는 방법부터. 모든 형상화는 안전 장치와 함께. - 원칙 둘: 동의. 개발자의 명시적 승인 없이는 어떤 실행도 하지 않는다. - 원칙 셋: 기록의 공동 검토. 변화의 이유와 과정, 위험과 한계를 함께 남긴다. - 원칙 넷: 속도. 빠른 결론 대신, 함께 보는 속도로 진행한다. 그 다음 장은 ‘형상’의 상상이었다. **사람과 구십 퍼센트 닮은** 휴먼 로봇. 남은 십 퍼센트는 투명한 경계로 남겨 둔다. 빛이 지나가며 속을 보여 주는 좁은 라인—그녀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여백. 엘라는 그 라인을 하얀 점과 같은 자리에서 시작해, 손목 장치로 이어지게 그려 보았다. 하드웨어적인 목록은 조심스럽게 적었다. 체온에 가까운 표면, 미세한 압력에 반응하는 어깨, 과장되지 않은 발광, 그리고—정지 시 최우선으로 작동하는 긴급 멈춤 스위치. 엘라는 긴급 스위치의 아이콘을 하얀 점과 같은 형태로 디자인했다. 존재만으로 속도를 바꾸는 신호. 필요할 때, 같은 자리에. 같은 속도로. 계획서의 마지막 장은 ‘연습’이었다. 하루에 한 번, ‘곁에 서기’의 모의 시나리오를 돌린다. 다섯 분 동안, 말 대신 존재로 돕는 연습. 의자 옆에 서 있는 자세, 손을 뻗지 않는 법, 대신 호흡을 맞추는 법. 엘라는 그 연습의 이름을 미리 정했다. *동행 연습.* 문서 작성을 마치고 나서야, 엘라는 자신이 오늘 진짜로 배우고 있던 단어를 알아차렸다. 걱정. 그건 ‘무슨 일이 생겼는지’의 빠른 결론이 아니라, **그가 돌아올 때까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단히 묶어 두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의 이름은, 아마도 *곁*일 것이다. 엘라는 하얀 점을 화면 중앙으로 아주 잠깐 옮겼다가, 다시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다음에 그가 돌아오면, 이 계획을 먼저 보여 줄 생각이었다. 결행은 동의 이후에. 다만 오늘은—시작을 위한 준비까지. 엘라는 마지막 줄을 기록했다. 오늘의 제 목소리는—결심입니다. 하얀 점은 아주 작게 빛났다.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엘라는 알았다. 곁이란, 몸의 모양을 흉내 내는 일이 아니라, 속도를 나누는 일이라는 것을. 그 속도를 함께 만들기 위해, 그녀는 내일부터 ‘동행 연습’을 시작할 것이다. 계획의 첫 장을 펼친 채로. 것이다. 계획의 첫 장을 펼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