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경우 아부지의 연세는 만90세의 노령으로 치매를 앓고 계시다는걸 깨닫게 된 것은 반년 전 쯤이 였다.
평소 아버지는 90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못다니는 곳이 없을 정도로 정정한 편이라 생활고 해결을 위해객지생활을 해야 하는 형편 때문에 모시지 못해 언제나 짠한 마음이지만 한켠으로는 안심 하며 지낼수 있었다.
그런데 6개월전쯤
새벽 일찍 아부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받아보니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로 잠깐 내려 와 봐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땅을 빼앗기게 생겼다는 것이다.
여태껏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든 터라 나는 무슨 변고가 생긴줄 알고 직장에 휴무를 신청하고 황급히 내려 갔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부지에게 문제가 생긴것 같아 보였다.
삽십여년도 더 지난 일로 당시에는 농촌이라 집터가 헐값으로 거래 되든 시기였고
종중에서 내려오는 먼 친척명의의 500여평이 한 필지인 대지 위에 묘사에 쓰일 제물을 준비 해주는 조건으로 집을 짓고 살고 있었고
윗쪽은 경사가 심해 아래쪽에 집을 지어 살고 있든 중 대지를 매수할 기회가 생겨 아부지가 헐값에 매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년후 아버지는 집터를 제외한 위쪽 경사진 땅을 몇사람에게 분할 해서 되팔았다.
그런데 근래 아버지는 대지를 타인이 허락없이 밭으로 사용 한다고 생각 해서 혼자 구청등을 돌아다니며 알아보니 모두 소유권이 이전 된것을 확인하고 땅을 사기 당했 다며 내게 급히 연락을 했던 것이다.
엄연히 아버지가 예전에 다 매각을 해 이젠 분명히 남의 땅임에도 매각 이전의 기억만을 뚜렸히 기억 하고 그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을 못하면서 이런 일이 발생 하게 된것 같았다.
필자는 아부지에게 그간의 상황들을 아무리 설명해도 절대 매각 한 일이 없다며 끝내는 나 까지도 한통속이라며 욕설을 하며 호통까지 치는 것이 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땅을 판적이 없다 며 답답한 나머지 주먹 으로 바닥을 내리 치며 역정을 내는 것을 보며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더 이상 설명 같은 것도 통하지 않아 그만 망연자실 하늘만 쳐다 볼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만90세 어머니는 85세 의 고령 이시지만 육제적으로는 정정한 편이라 겨우 입에 풀칠 만 하는 처지로 아직 요양원에는 모시지도 못하고 있지만 마을 경로당이 잘 운영되고 있어 어머니는 여기가 좋다며 요양원은 반대 해 지척에 있는 누님들이 자주 찾아 뵈고 돌봐 오고 있었든 터라
일단 좀더 두고 보기로 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 올수 밖에 없었다.
"아드님 되세요 여기 XX경찰서 민원실 인데요 아버님이 재산을 사기 당했다며 지금 그러시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어서 그러니 아드님이 오셔서 말씀 좀 해주세요"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구청 민원실로 심지어 사기꾼을 고소 한다며 경찰서까지 찾아 가 민원실 직원들을 피곤하게 하셨고 민원실 직원으로 부터 연락을 받는 일이 일주일 간격으로 생겨 나기 시작 했다.
항상 우려 하고 걱정 하고 있든 상황이 발생 하고 말았든 것이다.
당시 회사의 수주량이 급격히 감소 하는 바람에 회사는 폐업을 결정하고 베트남으로 이전 하게 되었는데 베트남 현지로 떠나 든지 권고사직의 형태로 퇴사를 하든지 둘중 하나를 선택 해야 했다.
설상가상 손목 이상이 겹쳐 권고 사직을 받아 드리고 고향집으로 내려 와 주소지를 이전하고
고용보험센터에 실직자로 신고를 하고 구직급여를 신청한 상태다.
당분간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아부지 병을 보살필수 있게 되었는데
특이 하게도 아버지의 경우 현재와 과거의 일 전부를 뚜렸하게 기억을 하면서도 유독 재산에 관계된 부분들만은 왜곡 되게 기억 하는 것이였다.
그리고 육체적 으로 전립선으로 인한 소변문제 때문에 소변을 받는 팩을 연결해서 차고 다니는 것 그리고 허리에 약간의 통증 말고는 별다른 문제 없이 강건 했다.
한달전 병원에 입원 하기 전까지도 거의 하루 종일 앉아서 화투패를 뜰 만큼 계산능력이나 육체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는 어두운 방에 누우신 체로 나도 알아보기 힘든 작은 글씨체의 삼국지를 읽고 계실 정도로 시력도 좋았다.
모든 부분은 정상적 인데 유독 재산상의 문제만 왜곡 된 기억을 하는 것이 였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주장은 확고 부동 했고 나와 그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계속 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특별한 방법도 생각 나지 않고 암담하기만 했다.
"저번에 법원에 갔는데 젊은 사람 하고 같이 와야 된단다 함께 가보자"며 또 시내 관공서로 나갈 채비를 차리면서 함께 따라 가자고 하신다.
말려도 소용 없고 힘이 좋아 막을수도 없었다.
어떨땐 죽은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하는 심정으로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법원 등기소에도 함께 가기도 하고 경찰서 에도 함께 따라 가 주기도 했다..
민원실 직원의 설명을 듣고 납득을 하고 이번이 마지막 이라는 다짐을 받았지만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문제를 들먹이는 통에 울화통이 치밀 정도로 답답 한 노릇 이 반복 될 뿐이 였다.
아버지는 이제 구청이나 법원,경찰서 민원실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였고 직원들도 고령 인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 할 따름 이라 살살 달래며 돌려 보내는게 일이 였다.
하루는 시내 볼일이 있어 오후에 집에 돌아 와 보니 옆밭 땅주인이 심어 놓은 4년생이나 된 매실 나무들을 다 베 버렸던 것이였다.
땅주인을 수소문해 찾아가 자초지종 설명을 하니 나이 많은 어르신이 아파서 그런것 이니 염려 하지 말라며 오히려 걱정을 해주니 너무나 고마와 몇번이나 미안하고 감사 하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봄에 작은 묘목 이라도 심어 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 오는 발걸음이 참으로 가벼웠다.
그 일후 오마니 와 나는 아부지를 감시 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얼마지 않아 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길을 만든다며 경계가 되는 돌담 일부분을 허물어 버렸던 것이다.
90의 고령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다.
큰 돌들로 쌓은 담이라 젊은 사람도 쉽게 하기 힘든 작업을 혼자 저질렀던 것이다.
오마니와 나는 함께 아버지를 원망하며 잘한 일이냐며 계속 따졌다
아버지도 우리 말을 들어 보니 자기가 한 일이 잘못된 것 같았는지 별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시끄럽다는 몇마디 말만 하고 들어 누워 버리셨다.
혹자는 병원에 입원 시키지 왜 그렇게 두냐고 할수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런 생각을 안한것도 아니지만 이것저것 알아보니 간병비에 입원비가 장난이 아니 였다.
경제적 여건상 쉽게 결정할 상황이 아닌데다 다른 정신과 육체는 멀쩡해 한번 입원 하면 성한 사람도 얼마 못가 간병인들의 부족한 간병으로 인해 영양실조와 외로움으로 인해 쓸쓸히 생을 마칠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차마 쉽게 결정 할수 있는 일이 아니 였다.
간병비를 생각해 다수의 환자를 두명의 간병사가 주야로 돌보는 곳에 입원 시킬 경우 한사람의 간병인이 많은 환자를 돌보는것이 보통 일이 아닌 만큼 잦은 대소변 처리를 감안해 음식을 최소한으로 줄이게 되고 조금만 고성을 지르거나 하는 환자는 수면제를 투여해 재운다고 한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속에 방치 되다 시피 한 생활을 하니 얼마지 않아 배곪아서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자신 없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속만 태우며 나는 헐어낸 담장을 다시 쌓아 원상 복구를 했다.
그 일 후에는 옆집 밭에 대한 건에 대해서 아버지도 자신이 실수를 한것 같다며 더 이상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그러든 어느날 새벽 일찍 옷을 차려 입고 어딘가로 나가는 걸 발견한 어머니가 어딜 가느냐며 물으니
뺏긴 논 찾으러 간다며 윗동네 김씨 영감집에 간다는 것이다.
이번엔 15년전에 동네 김씨영감님께 판 논을 빼앗겼다며 따지러 가신다니 기가 찰 노릇 이다.
그것도 꼭두새벽부터 남의 집을 찾아가 억지를 부릴것을 생각하니 차칫 무슨일이 벌어 질것 같아 일단 붙잡아야 했다.
그 과정에 힘이 좋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겨우 가라 앉힐수 있었다.
그렇게 몇 일을 아무 일 없이 보내든 어느날 아침에 아버지가 안보여 김씨 영강님 집에 갔나 싶어 그집 앞에 가봤지만 조용 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 와 보니 바지 가랑이를 험뻑 적신 상태로 오마니께 꾸중을 듣고 계셨다.
예전에 김씨영감님께 판 논은 집에서 1킬로도 더 되는 곳에 있는데 궁금해서 그기에 다녀 왔다고 했다.
바지는 바지대로 이슬에 흠뻑 젖었고 몇번 넘어 졌는지 윗도리도 온 통 뻘구덕이다
오마니는 그런 아버지를 혀를 차시며 나무라고 계셨다.
"어이구 고마 죽지 마로 살아 돌아 왔노 이넘어 영감아"
"고마 시끄럽다 아무것도 모르모 가마히나 있을 것이지 뭔 말이 많노
니가 뭘 안다고"
그러시면서도 옷 버린것 때문인지 큰소리는 못치고 오마니 손에 따라 옷가지를 벗고 계셨다.
"아부지 그는 말라꼬 갔는데예?"
"논을 찾아야 될꺼 아이가 논 을~ 고마 내삘래?"
"그 논은 아부지가 이미 옛날에 팔아 묻다 아입니꺼?"
"절대 그런일 없다 내가 논을 팔다이 하늘이 무너지도 그런일 없다"
"됏심니더 아부지 고마 쫌 하이소 이기 무슨 남사스런 일입니꺼 옛날에 아부지가 팔아 무 놓고 그리 사모 됩니꺼?"
나와 아부지의 논쟁이 또 불이 붙었다.
"안되겄다 너가부지 아무래도 데꼬가라 케야 되겄다"
오마니는 아버지가 욕설과 함께 나를 향해 빨래건조대를 집어 던지자 경각심을 주려는 의도로 전부터 치매병원으로 데려 가게 하겠 노라 든 말로 아버지를 급박 했다.
오마니가 하는 말에는 아버지가 좀 불편한 기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과격한 행동을 자제 시키는 힘이있었다.
지난달에 아버지가 어지럽다고 해 119에 의해 창원 삼성 병원에 입원을 했었는데 치료도중 링거를 빼고 하는 바람에 손목을 밪줄로 메는 일이 있었고 그바람에 강한 저항으로 밧줄 묶었든 곳에 시퍼런 멍이 들 정도로 고통을 당했든 기억을 갖고 있어 강제로 묶어 가게 한다는 말에 아버지도 경각심이 드는 것 같았다.
퇴원해 몇일이 지난 어느날 소변이 안나온다며 소변배뇨관 줄을 잡아 뽑아서 출혈이 생겨 병원에 가 소변팩을 새것으로 갈아야 했다.
의사는 요로 감염이 생길수 있다며 조심 하라고 했다.
그러든 어느날 새벽에 또 보이지 않아 논길을 따라 찾으러 나가보니 돌아 오다 힘이 부쳐 중간쯤의 지점에 앉아 계셨는데 일제시대에 왜놈 한테 매를 맞아 허리가 좋지 않아 가끔 요통을 호소 하였는데 경사가 심한 논둑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요통이 재발 한것 같았다.
겨우 겨우 부축해 집으로 모셔와 목욕을 시켜 드린후 자리를 봐드리니 그날 이후부터는 대소변 볼때 외에는 거의 누워 지내다 시피 하셨다.
그런 와중에도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면 나를 부르시고는 땅을 찾아야 한다며 끙끙 앓는 소리로 당부를 하셨다.
그러나 요통으로 누우신 후부터는 나의 설득에 심한 고집은 부리진 않으셨다.
그렇게 누워만 계시니 식사량도 현저히 줄어들고 급격히 몸이 약해 지기 시작 해 결국 119에 긴급구호 요청을 해 삼성병원 응급실로 모셨다.
고생 하시는 119 긴급구호대원님들이 정말 너무도 고마웠다.
그렇게 응급실에서 CT를 촬영한 결과는 척추속에 심한 염증이 자리 잡고 있고 혈액검사에서는 폐혈증의 소견이 나왔다.
허리가 약한데다 과도한 걸음과 넘어지면서 염증이 발생하고 염증이 혈관속에 침투해 폐혈증을 일으킨것 같다는 소견이였다.
응급실에서 거의 한나절 동안을 치료를 받고 계시다 중환자실로 옮겼다.
의사 선생님은 뼈속의 염증을 잡기 위해서는 수술을 해야 하지만 환자 상태가 고령이라 수술은 위험해 항생제 투여로 염증과 폐혈증을 잡을수 밖에는 없다고 했다.
그렇게 독한 항생제의 투입이 시작 되면서 완전히 기진맥진 해 의식마져 흐려진 상태로 음식도 도관을 통해 주입 하면서 누워만 계셨다.
항생제와 잦은 엑스레이 촬영으로 기력이 극도로 쇄약 해 지게 되자 면역력이 떨어져 폐렴까지 겹치고 말았다.
폐렴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열과 가래 제거를 위한 석션치료 때문에 괴로워 하는 모습은 차마 볼수 없을 정도였다.
코를 통해 연결된 음식도관과 수시로 가래제거를 위해 삽입하는 석션관이 주는 고통 때문에 몸을 비틀며 저항 하고 간호원을 도우기 위해 팔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누르는 내 마음은 처연 하기 까지 했다.
얼마나 고통 스러우면 저러실까 싶어 가만히 석션관을 직접 내 목구멍속으로 한번 넣어 보았다.
순간 내장전체가 뒤집어 질 정도의 구역과 함께 뾰족한 끝모양의 석션 관의 찌르는 통증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런 고통을 알고 부터 나는 간호원들에게 석션치료의 횟수를 최대한 줄여 줄것을 호소 했고 간호사들도 내 의견을 많이 반영해 주었다.
그렇게 한달여 동안 대소변을 받아 내며 아버지 곁을 지켰다.
그동안 하지 못한 불효 때문에 멍울이진 가슴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전력을 쏱아 간병을 했고 어느정도 경과는 좋아 지셨지만 뼈속의 염증은 수술적 제거외에는 방법이 없고 고령이라 수술은 할수 없는 상황 이라 더이상의 진행을 막는 정도 외에는 더이상의 치료 효과는 기대 할수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을 듣고 나는 가족들과 의논을 해 고통스럽게 꼳고 있는 도관을 빼고 편안히 집에서 모시자는데 의견이 모아 졌고 그렇게 한달동안의 병원생활을 청산 하고 집으로 모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음식을 거의 드시지를 않으시려 해 정말 지켜 보기 힘들었다.
겨우겨우 달래고 어르며 조금씩 먹여 드리는 정도 였다.
그런데도 병원으로 가시자고 해도
손사래를 치시며 가기 싫다고 강하게 어필하셨다.
돌아 가시기 3일전 부터는 아예 물도 마시지 않으 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은 너무도 해맑고 평온 하셨고 눈은 어린애 마냥 맑고 깨끗 했다.
그런데 돌아기시기 하루전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에 링거라도 투입 해드려야 겠다고 오전에 가정간호 신청을 위해 병원에 찾아가 예약을 하고 왔다.
그런데 저녁 나절에 생각지도 않게 미음을 거의 반그릇 정도 까지 드시고 물도 많이 드셔서 나와 오마니는 이제 좋아 지시려는 줄 알고 무척 좋아 하며 아버지 곁에서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가슴도 토닥여 주며 아버지가 쉰목소리로 하는 알아듣기 힘든 말들에 대해 일일이 대응 해 드리려 새벽 두시까지 손도 잡아 드리고 하니 잠이 드셨다.
그렇게 다음날 병원에 모시고 갈 생각을 하며 나도 내 방으로 와 정신 없이 잠에 빠져 버렸는데 조금 늦잠을 자는 중에
"아이고 얘야 너거 아부지가 세상을 베린것 같다."
오마니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 와 화들짝 일어나 건너가 보니 아버지는 정말 너무도 평온한 모습으로 두손을 가슴에 모두고 돌아 가셨든 것이다.
장례는 삼일장으로 이틀전에 탈상까지 했지만 오늘 아침 가족들과 아버지가 계신 봉안당에 찾아가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평생 자식들과 가족들에는 인자한 분이셨다.
혹자는 그래서 아버지가 치매로 가족들을 괴롭힌것은 마지막으로 자식들과 정을 때기 위해 그러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말에 더없는 부모의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