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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유공자 자격과 예우 신규등록과 재심 신청 절차

    2015. 4. 9. 09:00   티스토리 세상/세상살이 꿀팁

     


     
    “국가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쳐 싸웠던 참전유공자의 삶이 영예롭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국가적 책임이라고 할 것이다"

     


    국가 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해 줌으로 애국심의 표본이 되어 자라는 후진들의 애국심을 고취할수 있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도 제대로된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채 방치 되다싶이 해 그들의 노후와 가족들의 생계가 열악한 환경으로 어려움 중에 처해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특히 90여만명의 국군 용사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참전한 6.25 동란 참전용사들 로서  그분들 중 사망과 상이 판정으로 일찌기 유공자 혜택을 받아 왔든 가정은 그나마 좀 나은 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6.25 참전용사와 월남참전용사들중 다수의 참전자들이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통계를 보면서 이 지면을 빌려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왜 그분들에 대한 예우가 적절히 이루어 져야만 하는지에 대한 여러방면의 시각으로 진단한 내용의 글들이 있어 아래 링크를 달아 둡니다.

    위 링크의 내용과는 별도로 발행하고자 하는 아래 포스팅의 내용은 실제 하는 저의 가족사 이기도 한 이야기 입니다.

    왜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예우를 받아야 만 하는지.....
    아직도 사각지대에 계신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취지로 발행하게 되는 포스트 입니다.

    6.25로 인해 큰 상이는 아니 지만  나의 아버지와 나의 삼촌께서 아이러니 하게도
    아버지는 오른손 엄지를 삼촌은 왼손의 엄지를 두분다 뿌리부분까지 잃고 말았다.

    아버지는 동상에 걸린 손가락을 제때 치료 받지 못한 상태로 혹독한 훈련을 강행 하다 결국 말기에 이르러서 잘라 내는 수술로 절단 하게 되었고 삼촌은 총 파편이 튀어 잘려 나가고 말았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중


    그기다 아버지는 군대에서 선배로 부터 허리에 잘못 맞은 매때문에 허리뼈에도 골병이 들어 그 후유증을 지금까지도 가지고 계신다.

    두분다 한창의 나이인 20대의 나이에 이런 손가락 불구가 되어 버리니 이후 가정 형편은
    속수무책으로 추락해  가기 시작했다.

    배우자 선택에서도 불구라는 핸디캡이 따라 다녔을 것으로 생각 한다.
    (물론 이부분에 대해서 일언반구 어떤 언급도 하신적은 없으 셨지만 나의 추론이다)

    종전 이후의 국가 형편은 지구상 최빈국중의 하나로 최악이였다.

    그런 환경속에서 한집안에 피 끓는 젊은청년들인 두아들의 그런 모습에 할아버지는 결국 우울증으로 인한 음독까지 하기에 이르런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3남2녀의 자식들을 남겨 두고 돌아 가셨다.

    그렇게 시작된 한가정의 비극의 역사는 궁핖과 가난이라는 대물림의 역사가 펼쳐 지게 되었든 것이다.

    당시에 하루종일 노가다 판에서 일한 일당은 고작 쌀 한됫박 정도가 전부 였다.

    쌀 한되는 당시의 7인 대가족 시대 하루 끼니 정도를 해결 할수 있었으며 노임도 곡물로 지급되어 지든 시절 이였다.

    쌀 한되박은 가족의 하루를 연명할수 있는 정도의 수준 이 였다.

    하루벌어 하루먹는 다는 노가다 인부들의 용어가 이때부터 입에 달린 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삼촌은 그런 일도 할수 없는 처지 였다.

     

     

     

     

    요즘은 그래도 사람들의 지체 장애인에 대한 예우는 매우 향상되어진 편이지만 그때는 지체장애인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을때다.

    비록 손가락 하나 이긴 하지만 지체 장애 라는 이유로 주위친구들 조차도 끼리끼리 팀을 살짝 꾸려  정말 다급한 상황이 아니면 데려 가지를 않을 정도였다.

    자신들에게 제공되어질 기회를 나눌 파이가 줄어든다는 이유가 가장 큰 이유 이기도 했고

    정상적인 사람과 지체결함이 있는 사람의 일능률이 같을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잘못 인부 선정을 하게 되었을 경우 오야지로 부터 자신 조차 잘려 나갈수도 있기 때문에 선뜻 동참을 시킬수도 없는 노릇 이였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들은 어릴적 아부지로 부터 직접 전해 들은 증언에 의한 사실들 이다.

    당시의 상황이 어쩔수 없는 각박한 현실 이기 때문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 할수 있다.

    아버지는 젊은시절 할아버지가 운영하든 한약방을 계승 해 보려는 꿈을 접고 결국 농촌에 귀의 하기로 결심을 굳혔고 그렇게 소작농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며 혹독하고 궁핍한 농사일을 시작해 겨우 입에 거미줄은 면할정도의 수준으로 살게 되었고

    당시 헐값에 거래 되었든 변두리 논들을
    피나는 노력으로 한마지기 두마지기  사들여 평생 1000여평 남짓한 내땅을 만드시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부동산에 대한 안목의 무지로 인해 미리 개발 정보를 입수한 약삭빠른 중개업자들의 꾐에 합당한 댓가를 받지도 못하고 넘겨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 공부 시킬 여력이 부족 했고 하등 교육 만으로는 취업, 취직의 높은 문턱을 넘기 힘들게 되면서 결국 가난은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 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힘든 삶을 사시는 어른들이 어디 우리 아부지 뿐이 시겠는가?

     

     


    그러나 국가재정의 어려움이라는 이유로 적은 상이를 입은 상이 군인들은 몇십년 동안 방치 되어 힘든 삶을 살아오다 2000년  김대중의 국민의정부시절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확대 지정을 통해 그나마 많은 분들이 낮은 등급의 유공자 혜택 이라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유공자와 배우자및 자녀들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되어 주었다 


    삼촌(작은 아버지)은 6급 아부지는 7급의 판정을 받았다.

     

    . 


    [삼촌은 부산 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오랜병상을 지키시다 삼년전 별세 하셨고

    아부지는 아직 우리 곁을 지켜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지난 2011년 새로운 유공자 발굴및 보훈자들의 급수 상향조정을 위해 추가적 피해 실태 조사를
    실시 한다는 보훈처의 공문을 받아 아부지는

    군대내에서 보이지 않게 입은 허리뼈의 상해에 대한 신체 검사를 받으시겠다는 의지를 보이 셔서 우리 가족들은 방문 당일 보훈처에서 신체 검사를 받게 될줄 알고 아무런 준비도 못한채
    부산보훈처를 방문했지만

    고령의 아부지의 어눌한 설명을 제대로 파악조차 할 의지도 보이지 않고

    방문한 보훈처 직원의 냉랭한 반응으로 채 5분도 심사를 받지 못한채 되돌아 오셨다는 말을 들을수 밖에 없었다.

    당시 필자는 멀리 객지에 있었든 터라 누님 둘이 아버지를 모시고 가셨으므로 억울 하기 이를데 없게 된 일이였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고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계속되는 허리 통증에 대한 호소로 인근 병원을 내방 정밀 진단 결과 뼈의 연골 들이 많이 소실 되어 수술을 통해 인공 뼈 주입 수술을 하고서야 아부지가 힘든 고통의 나날들을 견디며 살아 오신걸 알게  되었다.

    평소 허리통증을 호소 했지만 자기 먹고살기에도 빠뜻한 자식들은 제대로된 검사 한번 시행하지 못한것을 너무도 가슴 아프게 생각 하며 후회 해 보지만 지난날에 대한 보상을 받을 길은 없는것이다.

    만약 조금만 더 일찍 알고 확대 상급심사에 엑스레이 사진만 이라도 첨부 했드라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지 참으로 안타  까운일이다.

    아부지는 평소 신경이 예민하고 불면증으로 신경정신과 약을 사십 여년 넘도록 복용 하고계신 탓에 우리들은 신경성으로만 치부하며 아부지의 고통을 몰랐든 것이 두고두고 가슴 아프게 생각 되어 지게 한다.

    우리는 당연히 병원에 가서 허리부분에 대해 엑스레이 정도는 촬영해 보신줄만 알았는데
    정작 아버지는 한의원의 뜸과 침에 의존하며 견뎌 오셨든 것이다.

    오늘 제가 이렇게 블로그를 통해 이런 개인적 사정을 토로 하게 된것은 혹시라도 저같은 경우 처럼 상급판정을 위한 재심사나 신규판정을 받으려 보훈처를 내방 하게 될경우

    무지해서 제대로된 서류를 준비하지 못하여 신규판정 이나 추가 지정을 못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이런 일을 도와 주는 곳이 있어

    여기 지면을 통해 소개 해 드리기 위해 서 입니다.

    <국가유공자 상담센터>라는 곳입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 하였지만 전후엔 사회생활을 제대로 영위 해나갈수 없는 지체및 정신의 장애로 인해 사회의 높은벽을 넘지 못하고 정작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생계가 곤란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사실들을 바라보는 후진들은 뭐라고 생각하게 될것인가?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한몸의 영위와 안위만을 지키는 것이 장땡으로 생각 하게 될것이고
    나라에 대한 애국심은 찾아보기 힘들게 될것은 뻔한 일이다.

    반대로 국가를  위해 희생하면 높은 영예와 존경을 받게 된다면 나라를 위한 영웅이 되고 싶어지게 될것은 자명하질 않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국가유공자의 예우는 모든 것에 우선시 되어야 할 국가 시책이라고 생각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블로그 포스팅을 여러번 결심 하든차 이번에 가입한 제휴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아이템중에 국가유공자들 발굴을 위한 아이템을 제공해 주셔서 여기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국가 유공자에는 몇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의 묘

    독립유공자 ( 순국선열 유공자, 애국지사 유공자)

    위의 독립유공자의 예우는 국립묘지를 방문해 보신분들 이라면 느끼 셨을 테지만 안장 예우부터가 특별한 최대의 국가 유공자분들이죠

    온 국민이 우르러는 존경의 대상 입니다.
    나라의 자랑스러운 분들 이시죠

    4.19혁명 유공자
    6.25전몰 유공자
    6.25전상 유공자
    5.18 민주유공자

    국가 유공자 상담센터로 부터 무료로 상담 받을수 있는 내용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국가유공자 등록가능성 / 예상 신체등급 판단
    (2) 병상일지/의무기록 정밀 분석 및 의학적 소견 개진

    (3) 비해당 처분 취소 / 신체등급관련 행정쟁송 사건 해결

    (4) 전담 변호사 직접상담

    이밖에도 유공자 등급과 예우에 관한 상세한 내용들과 유가족범위 유가족 혜택

    신청방법   변호사소개   법률서비스

    보훈혜택  보훈심사  신체검사  이의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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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소송  행정쟁송  준비서류  무료법률상담     등을 받아 보실수 있습니다.

    신규유공자 지정을 받고 싶으신 분이나
    등급 상향을 위한 재심을 받을 필요를 느끼신 분이라면 무료로  상담 받아 보실수가 있습니다.

     

    제가 유공자 가족으로 실제 살아오면서 듣고 겪었든 경험들을 바탕으로 작으나마 아직도 국가 유훈자 심사로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분들에게 조금 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여 정성들여 작성한 글입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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